한달에 한 두번은 영풍문고를 간다. 수년전 종각 근처에 사무실이 있을 때, 일과 사람에 너무 치일 때마다 종각역 지하에 위치한 영풍문고를 한바퀴 돌고 올라오는 걸 내 휴식의 방법으로 개발해 놓았었다. 사무실이 약간 멀어진 을지로 쪽으로 옮겨졌지만, 그 때처럼 가끔은 영풍문고를 가서 책 제목들을 쭈욱 훑고 오는 휴식을 즐기곤 한다.지난 금요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서점을 들어서 베스트셀러 코너 앞에 섰는데, 요란한 책장 덕분에 눈에 들어오는 책이 한권 있었다. '크로스'..? 그런데 작가 이름에 '진중권'이 있는 게 아닌가. 내 와이프가 좋아하는 미학자이자 논객, 진중권. 그의 책을 아직 읽은 적은 없으나, 이름은 수없이 들었던터라, 일단 책을 펼쳤다. 머리말과 목차를 간단히 보니, 정재승이라는 과학자와 진중권이라는 미학자가 동일한 여러 소재를 갖고 서로 교차(Cross)해서 글을 써 놓은 구성이었다. "와! 재미있겠다!"라는 생각으로 구매했고,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작가들의 글솜씨를 마지막 장까지 즐길 수 있었다. 아, 역시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한 권의 책 속에서 생각의 편차를 수차례 느낄 수 있게 해주면서 자연스럽게 '다름'을 인정한 (작가들의 의도한) "개방성"이 아닐까 한다.
무겁지도 않으면서, 내 시각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해 준, 작가 두 분께 박수를 보낸다~!!!
... by 我·益·魂
* 책 속에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책의 의도를 전하고 있기에 앞에 붙였다.)
'+프롤로그'에서...
'하나의 단편적인 현상이나 제품이 그 안에 거대한 세상의 속성을 그대로 담고 있어, 그 하나를 깊이 이해하는 것만으로 세상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엿본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정재승
'+에필로그'에서...
'이 책의 의도는 동일한 사안을 놓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시각을 교차시켜, 거기서 확인되는 편차를 통해 사물을 더 깊이 이해하자는 데 있었다. 이 콘셉트 자체가 현실의 층위에 정보의 층위가 겹쳐지고, 예술과 과학/기술의 경계가 흐려져 하나로 융합이 되는 시대를 반영할 것이다.' - 진중권
p.16. 미학을 닮아가는 미래의 경제학 - 커피가 와인과 달라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스타벅스'는 유럽의 섬세한 커피 취향을 미국에 도입해 성공을 거두었다. 어떤 원두를 어떻게 갈아 무엇과 섞느냐에 따라 다양한 커피가 만들어진다. ... 스타벅스는 커피의 입맛taste을 하나의 미학적 취향taste으로 바꿔놓았다. - 진중권
p.18. 커피 잔과 아이템 위에 새겨진 사이렌의 로고는 그것을 소유한 이가 어떤 '취향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말해준다. 일종의 '종족화' 현상이랄까. - 진중권
p.18. 스타벅스는 커피가 아니라 커피의 취향을 팔고, 나아가 문화적 취향을 판다. 스타벅스는 매장에 흐르는 음악의 선곡자이며 읽을 만한 책의 추천자이자 볼 만한 공연의 기획자다. 그것은 취향의 방향을 결정하는 비평가다. 듣자 하니 기존의 아이템을 선택하는 수준을 넘어, 앞으로는 아예 새로운 저자, 새로운 가수를 발굴해 소개하고, 새로운 영화까지 만들 예정이란다. - 진중권
p.19.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세계에서는 허구 자체가 세계가 되는 법. 허구로서의 커피, 서사로서의 커피가 오늘날에는 이미 에스프레소의 진한 액체만큼 진한 물질적 현실이다.
대중은 상품과 상품 사이의 '차이'를 소비한다. 중요한 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기호가치다. ... 스타벅스는 취미를 선사하고 전달하고 창조하는 문화적 매체다. 오늘날 기업은 취미로 묶인 상상의 공동체를 수신자로 갖는 미디어가 됐다. - 진중권
p.23. 낭만과 신비를 파는 스타벅스는 광고를 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 역시 고급화 전략 중 하나일텐데, 그 대신 스타벅스는 '스타벅스 엔터테인먼트'를 만들어 음악을 판매하고 있다. 그들은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와 독점 계약을 해 그의 새 앨범을 스타벅스에서만 살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예술'이 받아 들여지는 대뇌 영역 옆에 끼워 넣기를 하고 있는데, 스타벅스가 내놓은 음반이 그래미상을 받은 경력만도 여덟 번이나 된다. - 정재승
p.24. 초록 여신이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스타벅스 로고를 피험자들에게 보여주면, 즐거움의 중추와 브랜드의 가치를 음미하는 전전두엽이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 스타벅스는 '긍정의 심리학'을 십분 활용하는 매장이다. 커피숍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사이즈는 단연 '스몰small'이다. 하지만 스타벅스에선 가장 작은 것, 가장 싼 것을 시키면서도 '톨tall'이라고 주문해야 한다. 돈 내고 커피를 사 먹으면서도 '스몰'이라고 주문하며 주눅 들 필요 없이, 작은 것을 사면서도 당당하게 '톨'이라고 외치도록 만든 것이다.
...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파는 것'이라는 그들의 마케팅 전략이 21세기 문화산업의 중요한 프로토타입으로 오랫동안 유효할 것이기 때문이다. - 정재승
p.30. 스티브 잡스만큼 과학과 예술을 행복하게 결합한 인물이 또 있을까? 그만큼 사회적 트렌드를 제대로 꿰뚫어본 과학기술자가 있을까? - 정재승
p.35. IT 문화의 구루.. 그의 기조연설은 IT대중에게 예수의 산상수훈, 신제품은 IT 시대의 복음이어라 - 진중권
p.40. 예술가 CEO의 전형 : 미디어에서 떠드는 CEO 찬양, 현대 자본주의가 양산해내는 이 조작 신화들은 대부분 유치하고 뻔뻔하고 지루하다. 하지만 그것이 스티브 잡스에 관한 것이라면, 사정이 좀 다르다. 그는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CEO, 즉 '예술가 CEO'의 전형이다. 그는 컴퓨터 기기의 디자이너이자, 기술과 예술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지휘자이자, 프리젠테이션을 행위예술로 끌어올린 탁월한 퍼포머다. 동시에 IT대중에게 지혜와 확신을 주는 구루이자, 테크놀로지와 결합된 프리젠테이션으로 청중의 혼을 홀딱 빼놓는 마법사다. 빌렘 플루서였던가? 디지털 시대를 탈역사적 마법의 시대라고 했던 것이. - 진중권
p.45. 과거에 도서관은 정보를 모아놓은 하나의 장소를 의미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은 정보의 집적에서 이 장소의 구속을 파괴해버렸다. 오늘날 정보는 수많은 장소에 산포된다. 여기서 정보는 '분류'되는 대신에 위계질서 없이 '링크'된다. 인터넷은 디지털 시대에 환생한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다. 도서관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정보의 검색이다. 전통적 도서관에서는 기다란 서랍에 빽빽이 꽂힌 카드와 책 뒤에 붙은 색인이 인터페이스의 역할을 했다. 인터넷이라는 디지털 도서관에서는 검색엔진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 진중권
p.47. 오늘날 정보는 더 이상 희귀하지 않다. 외려 현대 대중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익사할 위함에 처해 있다. 이런 시대에 필요한 능력은 정보 하나하나를 해독하는 능력보다는 그렇게 범람하는 정보 속에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정보에 성공적으로 접근하는 능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검색인젠은 정보의 바다에 떠 있는 구명보트라 할 수 있다. - 진중권
p.48. 중요한 것은 새로운 정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정보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작하는 것이다. ... 학생들에게 나는 늘 영감을 일으키는 기계적 절차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게 뭐냐고? "구글에 들어가 검색창에 낱말을 타이핑하고 엔터키를 치라." 그러면 단지 그 낱말이 포함되어 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이제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수많은 텍스트가 화면에 나타날 것이다. 바로 그것이 디지털 시대의 기계적 영감이다.
물론 기계는 인간보다 멍청하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창작을 할 때는 장점이 된다. 기계가 전혀 엉뚱한 자료를 내밀 때, 인간은 본의 아니게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 밖에 존재하는 정보를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영감'이란 인간이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버위의 바깥에서 불현듯 사건처럼 찾아오는 어떤 것이다. 존 케이지와 같은 작곡가들이 우연에서 창작의 영감을 얻어냈듯이, 무작위로 돌아가는 검색엔진의 멍청함이 외려 인간의 상상력을 확장해 줄 수 있다.
... 이렇게 얻은 기계적 영감은 당연히 기계적 글쓰기의 바탕이 된다. 일단 구글 검색창에 검색어를 친다. 검색된 문건들을 순서대로 읽어나가면서 쓸 만한 자료는 복사해 'hwp파일'에 옮겨 놓는다. 이 작업이 끝나면 hwp 파일상에서 문건들을 읽어나가면서 불필요한 정보는 삭제하고 필요한 부분만 남겨놓는다. 이어서 그렇게 남겨진 조각 정보들을 앞뒤로 자리를 바꾸거나 이리저리 결합시키면서 몽타주를 한다. 이제 남은 것은 글을 매끄럽게 다듬는 일뿐이다. 내가 쓴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은 적어도 60퍼센트 이상 그런 방식으로 쓴 것이다. 이번에 낸 <<교수대 위의 까지>>는 99퍼센트 구글 검색을 통해 얻은 자료로 쓴 것이다. - 진중권
p.52. <오프라윈프리쇼>에도 소개된 바 있는 '23andMe' 서비스란 매우 간단하다. 서비스를 신청하면 일주일 안에 키드와 간단한 설명서를 집으로 보내준다. 이 키트 안에 침을 뱉어서 다시 우편으로 보내면, '내가 유전적으로 유방암과 당뇨병 등을 포함해 118가지 유전질환에 걸릴 가능성'을 확률로 표시해 알려준다. 그뿐인가? 유전자 검사를 통해 내 조상은 어디에 살았으며, 내 몸속에 얼마나 다양한 민족의 피가 섞였는지, 내 혈육의 뿌리를 찾아준다. 이미 시판되고 있는 '23andMe'서비스의 가격은 399달러. 필요한 분석기간은 8주다. 구글은 지금 침 한 번만 퉤 뱉으면 내가 누구인지, 내 몸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는 무시무시한 세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유전자가 포함된 인간 염색체의 개수가 23이라 '23andMe'라는 이름이 붙었다.) 2008년 <타임>지가 올해의 발명품으로 선정하기도 한 '23andMe'서비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제 구글이 세상에 떠도는 정보를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몸속에 있는 바이오 정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 정재승
p.53. 그들(구글)의 야심찬 꿈은 사람들이 병원에 갈 때마다 받게 되는 진료 카드 정보, 약을 처방받은 정보, 수술 정보 등이 모두 전산화 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한데 모으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만이 볼 수 있는 사이트에 들어가면 나의 유전정보를 포함한 모든 의료 정보가 담겨 있어 내 건강을 자동적으로 점검해주고, 때론 주치의에게 주요 상황을 알려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그들은 이런 정보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 정재승
p.56. 그렇게 되면 세상 모든 정보가 디지털화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책이나 문서 같은 텍스트 정보뿐만 아니라, 오디오와 비디오, 동영상까지도 모두 디지털화되면서 구분이 사라지는 세상이 10년 내에 올 것이다. ... 게다가 전자책이 대중화되는 데 만화가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이는데, 전자책의 만화 서비스 수준은 종이 책의 추종을 불허한다!
p.57. 프로그램 개발자와 통계학 전공자들로 가득 찬, 그래서 대부분이 전혀 창의적이지 않은 전 세계 검색 포털사이트 회사들과 달리, 구글은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인 사람들을 불러 모아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고 있기' 때문이다. - 정재승
p.62. '예방'이 가장 각광받는 분야는 단연 '의학'이다. 휴먼 게놈프로젝트가 완수됨으로써 질병을 일으킬 유전자를 찾아내는 연구가 가능해졌고, 발병 후 고치는 '치료의학'에서 발병하기 전에 막는 '예방의학'이 의학적 화두로 떠올랐다. "당신은 25~35세 사이에 정신분열증을 일으킬 확률이 56퍼센트입니다" 같은 메시지를 쏟아내는 의학형 예측 시스템이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방불케 한다. - 정재승
p.71. 앞으로 창의적이지 못한 기술은 기능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기술도 이제는 예술과 문학의 지원의 받아야 한다는 얘기다. - 진중권
p.79. 미디어 아티스트는 그런 파타피지컬 한 세계를 구상하는 이들이다. 인터페이스 디자이너들은 예술가들이 앞서 내놓은 구상을 실현해 대중의 일상으로 바꿔놓는다. 테크놀로지는 세계의 존재를 변화시키고, 그것의 상관자인 인간의 신체를 변형시킨다. 세계에서는 가상현실/증강현실/혼합현실이 중첩되고, 인간의 신체에는 탈신체화와 재신체화의 체험이 중첩된다. 제프리 쇼(http://www.jeffrey-shaw.net/)는 그 얇은 박막 위에서 다양한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신체의 디자이너가 되려 한다. - 진중권
p.87. 디지털은 캔버스와 물감을 비물질화하면서 마음대로 조작 가능한 데이터로 만들고, 예술가의 등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그 날개를 제일 먼저 펴고 훨훨 날아가 '창작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활공하는 제프리 쇼. 과학자가 예술가가 되고, 예술가가 과학자가 되는 '21세기 예술의 출발점'에 제프리 쇼가 서 있다. - 정재승
p.95. <20세기 소년>에는 '본격 과학만화'라는 부제가 붙어 있지만, 여느 SF처럼 그리 대단한 '과학기술'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소년시절, 우리에게 과학이란 무엇이었는가'를 끊임없이 되새겨보게 한다는 점에서 더없이 훌륭한 SF다. - 정재승
p.103. <20세기 소년>에서 소년 시절의 꿈은 정말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이제 그들은 '예언의 서'라는 만화적 상상력을 현실에서 실천하게 된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이의 취미를 즐기는 이들을 '키덜트'라 부른다고 들었다. 이 문화론의 용어를 슬쩍 심리학적 용어로 전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소년 시절의 만화적 상상력을 성인들의 현실적 세계에서 실현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랄까. 하지만 그 욕망은 오직 만화의 형식으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내 눈에 일본 사회는 거대한 만화책으로 보인다. - 진중권
p.115. 기쁨(:-))이나 슬픔(:()을 표현하는 미국식 이모티콘이나 스마일표시를 떠올려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서양 사람들은 주로 입 모양으로 감정을 표현한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주로 눈 표정에 변화를 주어 감정을 표현한다. 일례로, 우리들의 이모티콘(^.^, ㅠ.ㅠ, ㅜ.ㅜ, @@)을 떠올려 보시라. - 정재승
p.127. 내가 찍는데도(혹은 내 가장 가까이에서 찍는데도),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가장 왜곡된 모습'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셀카는 '삶의 기록'이 아니라 '욕망의 기록'이랃. - 정재승
p.132. 묵직한 아날로그 카메라는 사실 휴대하고 다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입학식, 수학여행,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행사에 특별히 동원되는 장비였다. 이렇듯 아날로그 시대에 카메라의 기능이 다분히 '집단적'이었다면, 주머니 속에 쏙 들어가는 폰카나 디카의 기능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이것이 카메라에 찍히는 제재의 성격도 규정한다. 즉, 특별한 계기에 동원되는 아날로그 사진의 제재가 다분히 '공식적'이라면, 특별한 일 없어도 늘 휴대하고 다니는 폰카나 디카의 제재는 지극히 '일상적'이다. - 진중권
p.133. 대중이 셀카로 자신의 이미지를 미적으로 이상화할 때, 그 모범이 되는 '미의 이데아'는 당연히 대중문화의 스타들이다. 오늘날의 문화산업은 현대인의 종교다. 자신의 삶을 미학적으로 조직했던 그리스는 다신교 사회였다. 그들은 삶의 가치와 이상들을 모두 신으로 의인화해, 그것들을 조각상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했다. 그리스인들이 신을 닮으려 했다면, 현대의 대중은 스타를 닮으려 한다. 셀카는 불완전한 현실의 여체들로부터 완전한 아프로디테의 형상을 추출하던 페이디아스의 조각칼이다. - 진중권
p.142. 한국인의 절반은 쌍커풀로, 절반은 외까풀로 태어나는데, 그중 한쪽만이 미의 기준이 되는 데는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 꼭 쌍커풀이 있어야 예쁜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쌍꺼풀이 너무 흔해 때로 천박하게까지 보이는 시대에는 외려 외까풀 미녀가 훨씬 더 빛나 보일 수 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김연아. '죽음의 무도'를 마치고 쫙 째려보는 그녀의 눈매는 아름다움의 극치가 아닌가(오, 여성의 아름다움은 마침내 저기서 완성됐도다. 찬양하라, 승냥이들이여). - 진중권
p.145. 공동체에 원만히 입성하려면 칼의 세리머니가 필요하다. 사회의 온전한 성원이 되기 위해, 유대인 남성은 성기에 할례를 받고 한국인 여성은 눈두덩에 할례를 받는다. 할렐루야...... . - 진중권
155. 20세기에 쏟아진 이야기는 그 전 시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보다 더 많았다. 영화와 텔레비젼, 언론, 인터넷, 게임 등의 발달로 우리는 유례없이 많은 이야기를 즐기다 못해 시달리고 있다. - 정재승
p.162.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외모와 행위의 아름다움 사이에 직접적 인과관계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주관적으로, 행위에 대한 윤리적 평가가 외모에 대한 인상을 좌우하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행위가 아름다운 사람의 얼굴은 깊게 팬 주름마저도 순결한 번뇌의 흔적으로 느껴지고, 행위가 너저분한 사람의 얼굴은 매끈한 피부조차도 뺀질거리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던가. 아름다운 행위는 그것을 하는 사람의 얼굴에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부여한다. - 정재승
p.175. 대중은 실물을 사는 게 아니다. 외려 가상으로 펼쳐지는 그 판타지를 사는 것이다. ... 프라다는 오늘날 증강현실이 아예 상품이 존재하는 방식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 진중권
p.183. 우리 기업들이 프라다에게 배울 것은, 21세기는 브랜드를 넘어 명성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 21세기 명품은 브랜드를 잘 만들고 마케팅을 어떻게 하느냐를 넘어 '제품과 함께 기업이 어떤 문화와 스타일을 파는가'로 결정된다. 프라다는 일찌감치 장인 정신은 버렸지만, 혁신적이고 세련된 문화를 가방 속에 끼워 팔았기에 '21세기 명품의 대명사'가 됐다. - 정재승
p.191. 그럼에도 생수 한 병을 마시는 것은 자동차 1킬로미터를 운전하는 것과 동일한 정도로 환경에 영향을 주며, 생수 1리터를 만드는 것이 같은 양의 수돗물을 생산할 때보다 600배에 달하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환경단체들이 2조 원이 넘는 생수산업에 반기를 드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 심지어 개가 마시는 생수도 나왔다. - 정재승
p.207. 상대에 대한 시야를 확보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는 왜 도처에 카메라를 깔아놓으려 할까? 그것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기 때문이리라. 권력을 행사하려면, 그 대상에 대한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그러므로 카메라 렌즈로 누군가를 포착한다는 것은 법적·정치적 의미에서 그를 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 몰래카메라는 피사체의 동의를 얻어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들여다보는 범법행위를 대중이 즐기는 합법적 오락으로 바꿔놓는다. 그것은 대중에게 타인에 대한 시야를 확보했다는 유사 권력의 느낌을 선사하면서 그들의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시킨다. 몰래카메라 프로그램은 노출증을 가진 미디어와 관음증을 가진 대중의 결혼에서 탄생한 아이라 할 수 있다. - 진중권
p.221. '반전 유머'는 인간의 가장 고등한 '지적 활동' 중의 하나이니, 학부모들이여, 대한민국 모든 청소년에게 <개그콘서트> 시청을 허하라! - 정재승
p.228. 텍스트는 시간적으로 전개되나, 이미지는 공간적으로 제시된다. 문자문화의 끝 자락을 입은 구세대는 코미디에서 플롯의 시간적 전개와 반전을 기대하지만, 이미 영상문화의 홍수 속에 사는 신세대는 플롯이 흐리지 않는 영원한 현재 속에서 순간마다 튀어나오는 이미지의 돌발을 즐기려 한다. - 진중권
p.261. 현실의 세계는 하나이지만, 가상의 세계는 여럿일 수 있다. 영국의 미디어 이론가 로이 애스콧은 세 개의 'VR'에 대해 얘기한다. 하나는 물리적 법칙이 적용하는 '검증현실 validated reality', 둘째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 virtual reality', 셋째는 식물의 환각작용을 이용해 입장할 수 있는 '식물현실 vegetable reality'이다. 예를 들어 브라질에서는 환각제를 이용해 또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 일상적인 종교활동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애스콧은 이제 인류는 물리적 신체와 가상적 신체와 환각적 신체를 갈아입으며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 거기서 또 다른 세계로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게 됐다고 주장한다. - 진중권
p.282. 프랑스의 심리학자 클로테르 라파이유가 쓴 <컬처코드>에 따르면, 레고는 독일로 수출하는 자신들의 완구 제품에 '상세한 조립법'을 담은 설명서(매뉴얼)을 넣어 팔았는데, 판매는 대성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에선 매뉴얼이 담긴 레고 시리즈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유달리 질서를 강조하는 문화적 전통에서 자란 독일 어린이들은 설명서에서 지시하는 대로 조립만 하면 자동차고 되고 우주선이 되는 레고에 열광했지만, '자유와 개척 정신'이 더 중요했던 미국 어린이들에겐 조립 설명서가 풀어야 할 숙제처럼 부담스러웠다는 것이다. - 정재승
p.297. 서구의 경우 16세기 구텐베르크 인쇄술, 17세기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18~19세기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탄탄한 문자문화의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또다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구술적 상황에서도 문자문화의 합리성이 그대로 살아남아 디지털 구술성과 성공적으로 융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키디피아는, 한마디로, 문자문화의 총아(백과사전)가 디지털 구술문화의 옷을 입고 새로 탄생한 것이다.
한국은 경우가 다르다. 대다수 사회 성원이 문자를 읽고 쓰는 시대로 접어든 지 불과 몇십 년밖에 안 됐다. 이렇게 문자문화의 전통이 짧다 보니, 구술문화의 습속이 사회에 강하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에서 인터넷의 사용은 정보적이라기보다는 친교적이다. 정보 대신에 반감이나 교감이 흐르고, 논리보다는 '포스'가 더 중시되는 것은 구술성이 강한 사회의 특성이다. 한미디로 한국 사회는 문자문화 이전의 구술적 습속이 디지털 구술매체를 만나 그대로 굳어버린 경우에 속한다. 서구와 한국의 이 차이는 지식 검색에도 반영된다. - 진중권
p.305. 위키디피아가 소중한 이유는 다음 세대에게 "공유할수록 서로 부유해진다"라는 인생의 놀라운 진실을 가르쳐주었다는 데 있다. 위키디피아는 우리들에게 지식을 운반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참여와 공유의 습관을 가르치고, 그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 정재승
p.306. 컨설팅 전문가이자 <위키노믹스>의 저자 돈 탭스코트와 앤서니 윌리엄스는 기업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능한 인재를 찾아내 난해한 문제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하는 혁명적인 시장에 주목했다. 그들은 이러한 시장을 '이데아고라 Ideagoras'라고 부른다. ... 기업에서 제시한 연구 과제와 과학자를 연결해주는 이 혁명적인 시장을 통해 기업들은 앞으로 내부적으로 핵심 인재를 키우면서 동시에 외부적으로 보완적인 아이디어를 구할 수 있다. 이제 기업들은 세계가 곧 자신들의 연구개발부서가 될 것이다. 이제 폐쇄적이고 단선적인 회사 내 연구·개발 풍토는 이데아고라로 인해 큰 변화를 겪을 것이다. - 정재승
p.314. 김광우가 쓴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에서는 이들(칸딘스키와 클레)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칸딘스키가 쓴 글의 한 대목을 인용하고 있다. "색은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힘이다. 색은 키보드이고, 눈은 망치이며, 영혼은 끈이 달린 피아노다. 예술가는 연주하는 손으로 하나의 키 또는 다른 키를 두들겨서 영혼이 떨리게 만든다." - 정재승
p.321.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일한 것도 아니다. 우주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잠재성의 총체이고,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는 그것의 '고립된 예'에 불과하다. 주사위를 던지면 실현되는 것은 하나의 눈이지만, 주사위에는 실현되지 않는 다섯 개의 가능성이 있다. 클레는 이 실현되지 않은 우주의 잠재성을 전개해 가시화하려 한다. - 진중권
p.338. 박사과정이 행복했던 이유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세상 물정 모르고 수많은 책과 논문과 자료를 미친듯이 읽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는 것, 그리고 실험실에서 밤을 새우며 데이터와 씨름하고, 논문의 문장 하나를 수정하는 데 며칠 밤을 새울 수 있는 열정의 추억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기회를 부여받은 삶이 많지 않다는 것을 세상에 나가보면 비로소 알게 된다. ... 박사에 대한 음담패설 중에 박사 학위의 약어인 'Ph.D.'가 'Pretty Huge Dick(매우 큰 성기!)'이란 게 있다. 그러나 나는 'Ph.D.'가 'Pretty Huge Dream'이라고 믿는다. 세상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 싶은 거대한 꿈 말이다. - 정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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